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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해월신사님 터가 살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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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해월신사님 터가 살아있어요”
  • 손윤_본지 발행인 ․ 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
  • 승인 2019.08.22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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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근 경주문화원 원장과 천도교경주교당 지킴이 이화자 할머니가 3.1운동 특별기도 터인 폐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손윤 이사장 제공
▲김윤근 경주문화원 원장과 천도교경주교당 지킴이 이화자 할머니가 3.1운동 특별기도 터인 폐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손윤 이사장 제공

동학혁명의 영도자이자 삼경의 생명사상을 이 땅에 남기신 해월 최시형 신사님께서 태어났다는 경주시 황오동 227번지 옆, 같은 동 229번지에 ‘천도교 경주시교구가 있다. 1910년 의암 손병희 성사 제세 시절에 천도교중앙총부 소유였던 이 땅을 손승조가 매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시 천도교당은 해월의 제자이자 천도교 3대 교조인 의암성사님이 1910년 해월 신사의 탄생지 1천여 평을 매입한 터 중 일부다. 해월 신사님은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났다.(위 내용에 있는 ‘경주시 교구’와 ‘손승조’, 그리고 아래 내용에 나오는 ‘정광조’ 등에 대한 부연 설명은 본 기사 끝에 별도로 정리한 내용 참조)

필자가 경북 경주시 황오동 227-3번지 도로 7㎡(2평)의 ‘토지이용계획확인서’를 인터넷에서 열람한 후, 등기부 등본을 확인하고 순간 크지 않은 눈이 동그라졌다. 현 소유자가 정광조이고 1923년 8월 21일 소유권보존 등기된 상태 그대로였다.

폐쇄등기부 증명서를 징취한 결과 확인이 되며, 토지대장에는 이에 앞서 1912년 8월 15일 경성부 가회동 79 정광조 소유로 되어있다. 따라서 천도교중앙총부 소유의 일부 부동산을 천도교 간부였던 정광조 명의로 관리하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아 해월신사님 생가가 살아계시네요”

같은 동 227-2번지 대지 195㎡도 1935년 4월 17일 정광조 소유였다가 박우경에 소유권 이전된 것을 조사·확인하였으니, 경주시 황오동 227번지 일대가 해월 최시형신사님 생가터였음이 공부상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같은 동 227-1 대지 36㎡는 같은 동 244번지에 합병되어 (재)대한예수교정로회경동노회유지재단 소유로 있다가 2014년 6월 19일 경주시에 수용되었다. 현재 경주시의 소유로 되어 있으니, 그나마 생가터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이 보여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천도교의 전신 동학은 봉건 전제왕조 및 왜와 양에 정면으로 맞섰기에 부패 왕조와 제국주의 외세로부터 동시에 살육을 당하였다. 그리고 일제 무단통치 시에 3․1 대혁명을 주도해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교세가 약화됐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각 교당의 소유권도 압수를 피해 개인등기화해 많은 땅과 건물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곳도 세 필지 중 두 필지가 일본 강점기에 임자가 바뀌었다. 앞에 쓴 것처럼 해월 신사님의 탄생지는 경주교당 뒤뜰 담 너머 경주시 공용주차장 부지에 있으며, 공중화장실로 쓰이고 있다고 하니 우리의 슬픈 근현대사 역사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 도로로 쓰이고 있는 해월신사님의 생가터 황오동 227-3가 정광조의 소유로 되어 있다면 절차를 거쳐서 (재)천도교유지재단의 소유로 이전 또는 주장할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용주차장 관할 경주시와 협의 또는 성지화 과정을 밟는다면 만민이 평등하다는 해월신사님의 큰 가르침을 경주시민과 천도교가 공유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경주교구]

경주군 교구연혁에는 227번지의 전(田)252평을 '제2대 교조 최해월 신사 유허지'라고 특별히 표시했다. 1910년 황오리의 손승조 씨가 최시형 선생의 생가를 포함해 현재의 경주교당 등을 매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생가터는 1935년 경주교당 신축을 위해 일반에 매각된다.

포덕 76년 3월(1935. 3) 본 교당은 원래 고가(古家)로써 전도될 염려가 유하여 위험한 상태에 지함으로써 부득이 개축하기로 결의하고, 본원 소유 전15두락과 부인전교실과의 매각 대금 4백여 원과 일반 동덕의 희사금 백여 원 합계 5백여 원으로 본 교당을 신축하다.

경주교구의 땅과 가옥을 매입한 지 25년 되는 해였던 1935년 228번지 부인전교실과 227번지 해월신사 생가터(전 15두락)를 팔았다는 것이 경주군 교구 연혁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다른 주장도 있다.

경주교당에 살고 있는 신도에 따르면 선생의 생가터에는 1956년경 집이 있었고 경주교구에서 세를 받고 있었지만, 후에 어떤 교인이 팔아서 이자를 불리는 게 더 좋다하여 팔았고 다른 교인이 이자를 준다며 돈을 가져가 떼먹고 교회도 안 나왔다고도 전한다.

그때 227번지가 기독교 교회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1950년대 말 내지는 1960대 초반까지 해월신사 생가터(227번지)를 경주교구에서 관리했다는 것으로, 경주군 교구연혁과는 다른 기억이다.

[손승조]

일제강점기 중 핍박받은 천도교의 재산을 수호하기 위하여 천도교 간부였던 정광조의 수교인의 신분으로서 천도교중앙총부의 재산을 명의 상 소유하게 하여 신탁 관리하게 한 명의수탁인으로 보인다.

천도교 기록에 의하면 포덕 51년(1910) 1월 경주군 황오리 손승조 씨는 천도교중앙총부 정광조 씨로부터 전교를 수(受)한 후 동 리 229번지의 대지와 동 지상의 건물 미가(尾家) 정침(正寢) 1동 5간 행랑 2동 4칸과, 동 228번지의 대지와 지상 건물 미가 정침 1동 6칸과, 동227번지 전(田)252 평(제2세 교조 최해월 신사 유허지)과를 천도교중앙총부로부터 매수(買受)케 하고 전기(前記)건물 229번지 상(上) 정침1동 5칸에는 남전교실로 , 228번지 상(上) 정침 1동 6칸에는 여전교실로 설립하였다고 되어 있다.

[정광조(鄭廣朝)]

의암 손병희의 둘째 사위로 1883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출생했다. 1891년 동학(천도교)에 입교했으며,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와 제일고등학교,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1910년 졸업 후 귀국해 천도교 중앙총부 서계원을 시작으로 대종사, 포덕과 주임, 부도령, 대령, 대도정, 고문, 현법사, 상주선도사, 교령 등을 역임했다. 1919년 3·1운동을 앞두고 손병희의 측근이 되어 3·1운동 준비에 참여했으며, 이후에는 천도교의 운영과 사후 수습 등에 노력했다.

같은 해 5월 의친왕(義親王)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 한 대동단사건(大同團事件)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20년 신숙을 천도교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조달, 제공하기도 했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교감으로 취임했으며, 1922년에는 이사로 재직했다. 1921년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 1930년 조선농민사 고문, 1934년 친일단체인 시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천도교인의 친일협력을 촉구하는 강연을 하고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다.

1943년 8월에는 천도교 대표로 직접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에 징병제 실시 감사헌금 500원을 전달했다. 해방 후 천도교 중앙총부의 전국대회 준비위원회 교약 기초위원, 천도교중앙총부 장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준비위원회 부회장, 남조선과도입법 관선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1951년 3월 13일 사망했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75∼90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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